- 평점
- 9.1 (1994.03.05 개봉)
- 감독
-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 리암 니슨, 벤 킹슬리, 랄프 파인즈, 캐롤라인 구달, 조나단 사갈, 엠베스 데이비츠, 말고스카 게벨, 쉬무엘 레비, 마크 이바니어, 베아트리체 매콜라, 안드레이 세윈, 프리드리히 폰 던, 노버트 와이저, 요헨 니켈
쉰들러 리스트를 처음 보는 느낌은 무거운 느낌이 컸다. 그의 양복을 입는 장면에서 나치 일원임을 상징하는 배지를 달고 있는 것을 클로즈업했기 때문이다. 그 배지에서 나오는 우러나온 자신감이란 독일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양복으로 갖춰 입은 쉰들러는 파티에 참석해 여러 고위 인사들을 제 편으로 섭렵한다. 이는 부패한 윗사람들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이에 맞게 행동하는 쉰들러 또한 ‘부패’라는 단어의 상징적인 인물로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유대인은 행동에 대한 제약이 생겼다. 사업가 기질이 특출한 쉰들러가 이 기회를 놓칠 리는 없다. 다짜고짜 찾아간 은행에서 이자크 슈텐이라는 회계사를 만났고 반강제적인 어조로 자신의 사업에 동참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 둘의 사업 계획에서 업무는 확연히 나누어졌다. 슈텐은 재무 담당, 쉰들러는 로비 담당이었다. 전적으로 쉰들러는 슈텐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전쟁의 상황은 슈텐을 신뢰 수준으로 노동할 수밖에 없었다. 삐걱거리는 둘의 조합은 인간적인 관계에서도 삐걱거렸다. 더욱 신뢰를 다지기 위해 쉰들러는 슈텐에게 술잔을 같이 기울인다거나 둘 만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슈텐은 쉰들러에게 적대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쉰들러의 사업은 군용 식기를 만드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사업이 잘된 것은 당연지사였으나 쉰들러의 사치적인 생활도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경영자로서 사업에 관한 관심은 오로지 ‘얼마나 벌었나.’의 차이였고 노동자들의 관리는 소홀하기 일쑤였다. 그저 투입물에 비해 산출량이 얼마나 큰가에 관건이었다.
쉰들러의 사업은 호황을 누렸으나 한 번의 난관이 봉착한다. 그것은 아몬 괴트의 막사에 노동력 투입이었다. 그래서 쉰들러의 노동자들을 그쪽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쉰들러의 솔깃한 사업제안에 괴트 또한 동참하게 된다.
괴트는 쉰들러와 친해지면서 쉰들러의 노동자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들의 거래관계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괴트는 속으로 쉰들러는 동경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과 몸짓을 닮고 싶었다고 술자리에서 고백한 바 있다.
괴트는 전형적인 독일의 악의 상징이다. 그가 하는 유대인에 대한 심심풀이 학살이 바로 그 예이다. 유대인 노동자들을 괴트의 잔인한 학살에 두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의 쉰들러는 무엇을 경험했을까?
쉰들러는 향락에 빠지고 있었다. 고향에서 부인을 두고 온 쉰들러는 이곳으로 온 정착한 후에 정부(情婦)를 두었다. 우연히 정부와 함께 언덕바지로 말을 타고 온 쉰들러는 독일군이 유대인에게 하는 만행을 목격하게 된다.
참고로 쉰들러 리스트는 흑백 영화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의도한 것은 시대적인 배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흑백으로 만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때의 쉰들러가 독일군의 만행을 목격하는 그 장면에서 여자아이에 눈을 뺏기고 만다.
한 가지 이유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그 아이의 코트가 유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빨간색 코트를 입고 있었으며 잔잔한 배경음악 속에 주변은 독일군의 학살이 일어나고 있고 아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길을 배회하고 있었다. 아이가 어느 건물로 들어가기까지 쉰들러는 그 아이의 모습을 뒤쫓았다.
왜 그 아이만 유색으로 보이게 했을까? 그것은 쉰들러의 양심 가책을 느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아이가 상징으로 띄는 게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쉰들러는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묘한 동정을 느끼게 된다. 점차 쉰들러의 변하는 모습을 느낀 슈텐은 쉰들러에게 마음을 서서히 열게 된다.
쉰들러는 아몬 괴트에게 술자리에서 진정한 권력은 용서해줄 때에 비로소 생긴다고 하였다. 그 말의 실제 의미는 무참하게 죽임당하는 노동자들의 무분별한 희생을 멈추기 위함일 것이다. 속뜻을 모르는 괴트는 쉰들러의 말에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악의 상징성을 띤 괴트에게는 그 말을 따라 행동하기에는 좁은 그릇이었다.
괴트와의 거래 후에 공장 사정이 좋아지는 듯하다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명령인,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모집시키라는 명령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이 명령으로 슈텐과 쉰들러는 이번에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가질 수 있는 날의 술자리는 슈텐이 한사코 거부했던 술을 같이 마심으로써 둘의 화해가 맺어질 수 있었다.
그 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모집시키기 전에 하나 더 명령했었는데 파묻었던 유대인의 시체를 태워 없애라는 명령이었다. 쉰들러는 그 현장에 가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던 여자아이의 시체를 보게 된다.
여자아이와 쉰들러의 만남은 이 영화에서는 큰 비중이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쉰들러의 방탕한 삶을 접게 해주면서 유대인을 진정으로 동정할 수 있는 시각을 준 것이며 이에 더불어 쉰들러가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용기를 주게 해준 것이다.
왜 영화 이름이 오스카 쉰들러가 아니고 쉰들러 리스트였을까? 이는 쉰들러가 여자 아이의 시체를 보고 나서 알게 된다.
쉰들러는 노동자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지 못하게 고위 계급자들을 매수했다. 그가 여태껏 벌었던 재산들을 털어서라도 노동자들을 구해내려 했던 것은 그만큼 그가 전쟁에 대한 시각이 비판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매수하고 나서 슈텐에게 그(쉰들러)의 노동자들의 이름을 써서 전 인원의 리스트를 만들라고 한다. 슈텐과 며칠을 그렇게 쉴 틈 없이 작성을 하고 나서 끝낸 후에 슈텐은 쉰들러에게 말을 한다. 이 리스트의 양옆의 여백은 가운데의 명단을 지키는 방패와 같다고 했다. 쉰들러의 리스트는 유대인에게 생명부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은 어땠을까? 쉰들러는 생명부를 완성해서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를 나눠 열차에 태운 후에 자신의 고향으로 보냈다. 그러나 서류상 잘못된 기재로 여성 노동자는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타게 된다. 가면서 도착할 때의 음식이 무얼까 하며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갔으나 가는 중에 기찻길 가에 서 있는 꼬마 아이가 그들에게 자신의 목에 손을 긋는 행동에 그들은 상황이 잘못됨을 직감한다. 점점 말을 없어지고 고요한 긴장감이 객실 안을 훑고 지나갔다.
결국, 도착한 곳은 그들이 아니라 바랐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굴뚝에서는 한 겨울밤에도 백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몬 괴트의 노동자 수용소에서 그들은 아우슈비츠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먼저, 머리를 삭발하듯 자르고 어느 공간으로 집어넣고 문을 잠그는데 그곳에서 독가스가 나와 죽인다는 얘기였다. 이들은 그것이 잘못된 말이라고 하였다. 더불어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는 것은 ‘노동력’이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은 전혀 죽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쉰들러가 이 영화에서 비치는 모습은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근거 없는 말이라고 여겼던 얘기가 지금 현재 상황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지녔을까. 그들은 머리가 마구잡이로 잘렸고 어떤 방안으로 들여보내 졌고 문은 굳게 잠갔다.
이제 그들은 자신 머리 위에 있는 호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죽음의 숨결이 자신의 곁에서 아른거렸던 것이다. 울부짖을 기력도 없었다. 이들은 말없이 죽음을 기다렸다. 굳어진 표정으로 참담한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호스에서 어떤 액체가 나왔고 처음에는 독가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지만, 뒤에야 그것이 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환희가 가득 찼다.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게 해보는 장면이었다.
쉰들러는 서류가 잘못 기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서 그들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본래 가야 했던 쉰들러의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쉰들러의 두 번째 사업은 무기 탄알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업에 관해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슈텐은 쉰들러에게 찾아가는 날이 오게 된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탄알들이 불량품이라 공장이 기울어간다는 말에 쉰들러는 ‘오히려 불량품인 탄알을 만들면 무참히 죽임당하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 아니냐.’는 말에 슈텐은 더는 참견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에 독일은 결국, 소련에 항복하게 된다. 공장에서 떠나야 했던 쉰들러는 오히려 유대인들을 더 살리지 못했다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의 눈물은 진실로 범벅이 된 눈물이었다.
그가 처음 자랑스럽게 차고 있던 나치 배지는 쉰들러에게 유대인 한 사람 더 살릴 수 있는 몫으로 여기게 됐다. 노동자들은 쉰들러를 위해 반지를 선물해주었고 ‘한 사람을 구함은 세상을 구함이다.’ 라는 글귀를 새겼다.
쉰들러에게 유대인 한 사람은 한 사람이었지만 그 글귀에 따르면 몇 개의 세상을 구한 것일까?
수많은 유대인을 구했던 쉰들러를 구제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유대인이었다. 그를 사람으로서 구제를 해주었고 사람의 양심 가책을 느끼게 했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쉰들러의 리스트는 없었을 것이다.